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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by 독자 posted Sep 2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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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풍경소리> 양식덕분에 잘 살고 있는 독일 베를린의 노춘원입니다. <풍경소리>안에 담겨진 많은 분들의 진한 사랑은 척박한 이 곳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저희 부부의 소중한 양식이랍니다. 간혹 참으로 잘 차린 진수성찬을 너무 혼자만 과식(물론 제 아내와 같이 열심히 나누고 있습니다.)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염치없이 열심히 받아먹고만 있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며 굳세게 잘 살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풍경소리>에서 우리의 스승이신 현주형님과 희수형님 등 그리운 많은 분들과 좋은 분들을 만나는 기쁨과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시는 은혜를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웬지 가식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무척 어려워서 그렇지 마음으로는 수없이 소식을 띄웠습니다. 김목사님, 고국에 있었으면 이렇게 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 가족들이 이 곳 독일 선교사로 파송받아 베를린 한빛교회를 섬기기 시작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만 3년 6개월이 지나 이 곳에서 네 번째의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참 세월이란 놈은 정말 쐥쐥 잘도 날아갑니다.
98년 5월 6일에 베를린 땅을 딛고 살면서 속절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야무지게 움켜 쥔 주먹으로 훔쳤던 말못할 서러움과 어려움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은 나름대로 잘 헤쳐 나가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알려진 독일에 와서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는 성숙하고 안정된 사회라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약소 국가의 속 좁은 국수주의자(?)인 제 입장에서 볼 때 못마땅한 점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그 것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 없지만 언젠가 살다 보면 그러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곳 독일 안에서 살아가는 한인들의 모습을 보면 제가 마치 저의 70년대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때때로 느껴지는 것은 한 편으론 답답하고 다른 한 편으론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등 아주 묘한 감정에 젖어 들게 한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처럼 계속해서 한인들이 이어지는 이민사회가 아닌 이민 1세대로 단절된 상태에서 30여 년을 살아오신 분들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더욱이 60-70년대 초반에 간호원으로, 광부로, 기술연수원으로 이 곳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하던 교민 1세대들은 대부분이 그 당시 본인들이 독일로 왔을 때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분들이랍니다. 이 것은 부정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중국이나 러시아 동포들이 나름대로 한민족의 얼과 숨결을 지키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가려는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독일식 생활 습관이나 음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하지만 한국적인 습관과 음식에 있어서는 옛날 그 대로를 고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20-30여 년 전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말하곤 한답니다.
그런데 제가 섬기고 있는 베를린 한빛교회는 교민 1세대는 70세가 넘은 두 할머니 권사님과 50대인 여 집사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교민 1.5세대 한 가정과 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이 유학생들도 90% 정도가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고 냉소적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그 동안 저를 만나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특히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철학자 니체를 전공하던 한 철학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것도 팽개치며 웬만한 베를린 유학생들이면 다 알 정도로 방황하다 결국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방황하던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수개월 동안 오직 성서만을 붙잡더니 마침내 중단했던 박사학위 논문을 마쳤습니다. 그것도 막혔던 논문과 인생을 뚫을 수 있는 동력은 자신이 수개월 동안 손에 잡았던 성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동안 저의 삶은 뚜껑이 굳게 닫힌 가마솥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마치 벌겋게 이글거리는 장작불에 달구어진 가마솥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뜨겁고 무서워 그 곳에서 벗어나려고 미친놈이 되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굳게 닫혀 있던 뚜껑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확 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제가 예수를 만났던 순간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어서 그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이 메이는 소리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라고 토해 내던 그 순간엔 우리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에 한 학생은 베를린 자유대학의 정치학 박사과정에서 칼 맑스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지난 1년 동안 저희 교회에서 전도를 제일 많이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롭습니다. 이들 모두가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나름대로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할 사람들인데 이처럼 우리의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어 돌아간다면 한국 교회와 사회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겠는지요?
목사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즐거운 성탄과 희망찬 새 해를 맞이하여 김목사님과 <풍경소리> 모든 가족들께서 더욱 건강하시고 가정 위에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프카니스탄이나 우리의 다른 한 쪽 북한에도 그리고 온누리에 가득했으면 합니다. 책방일도 내년에는 더 번창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05-07-01 광명시민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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