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유태인 참가자, 그리고 손기정

by 관리자 posted Apr 1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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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유태인을 비롯한 비독일인에 대한 이중 정책을 쓰며 이들을 지속적으로 모든 스포츠 단체에서 몰아내고 있었다. 여기에는 높이뛰기에서 독일 기록 (1,60 미터) 보유자인 유태계 여자 육상선수 그레텔 베르크만 (Gretel Bergmann) 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935년 여름에 미국의 언론이 독일 스포츠계의 유태인 배제정책을 비판하며, 베르크만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독일이 1933년 5월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한 ‘유태인의 올림픽 참가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공론화 시켰다.

이러한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한 독일은 즉시 유태인인 베르크만을 올림픽에 참가시키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그녀를 다른 모든 독일인 올림픽 출전 후보자들과 똑같이 대하기로 약속하게 된다. 이리하여 독일은 수 명의 유태인을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 참가시키게 된는데, 심리적인 위축과 불공평한 분위기 연출로 인해서 이 선발전을 통과하게 되는 사람은 베르크만 단 한명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유태인에 대한 약속외에도 대외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의 제국체육위원장 (Reichssportfuehrer) 은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계 독일인 헬레네 마이어 (Helene Mayer) 에게 별도의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도 올림픽 출전자격을 주겠다고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서 독일은, 독일에 대해서 별로 우호적이지 않던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에 이미지 관리를 위한 ‘역공’을 펼친 것이다.

이 획기적인 초청이 국제적으로 뉴스거리가 되는 가운데, 1928년 올림픽 펜싱종목 우승자인 헬레네 마이어는 제국체육위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자기의 독일 국적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이를 언론에 공개한다. 이 확인이 없으면 어떻게 독일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독일을 위해서 싸우겠느냐는 논지였을 것이다.

이 요청에 접한 독일정부가 국가서기장 푼트너 (Pfundtner) 의 친필 서명으로 이 확인서를 샌프란시스코의 독일 영사관을 통해서 전달하자,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던 그녀는 참가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녀는 당시 올림픽 보이콧트를 주관하던 단체들을 실망 시켰으며, 또한 독일의 반유태 체육정책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935년 12월 6일에 애버리 브런디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과반수가 가까스로 넘는 표수로 미국의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스튜트가르트 (Stuttgart) 출신의 육상선수 그레텔 베르크만 (Gretel Bergmann) 은 결국, 그녀의 기록에 굴곡이 심하다는 이유로 출전선수명단에 오르지 못하게 되는데, 이 최종적인 결정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참가 선수단이 이미 배편으로 출발한 후에야 내려졌고, 이어서 본인에게도 전해졌다.

베르크만은 이 일이 있은 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1937년과 1938년에 각각 1,58 미터를 뜀으로 해서 미국육상선수권대회에 우승을 함과 동시에, 그녀의 기록에 굴곡이 심하다고 한 독일 체육위원회의 판단을 반증 (反證) 했다.

헬레네 마이어는 이 경기에서 준우승을 하게 되었는데, 우승자인 헝가리의 일로나 엘렉 (Ilona Elek) 과 3위인 오스트리아의 엘렌 프라이스 (Ellen Preis) 입상자 3명이 모두 유태교 신자였다고 한다. 헬레네는 1937년 파리에서 펜싱세계선수권대회에 한번 더 독일대표로 참가해서 우승을 하고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 외에도 동계올림픽에서 반유태인 루디 발 (Rudi Ball) 이 아이스하키 종목에 출전했다.

이 올림픽에서 유태인도 아니면서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안고 42,195 km를 달린 손기정 선수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고, 더 부연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손기정씨와 베를린에 얽힌 숨은 얘기를 하나 하고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직접 경험한 당사자에게서 들었으니. 믿을만한 이야기라고 해 두자.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80년대 말경로 추측된다. 손기정씨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베를린 한인회에서 손기정씨를 위한 환영의 모임을 열고는 다 같이 식사중이었다고 한다. 한 젊은 태권도 사범이 그 자리에 같이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손기정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단다. 인사를 받고는 손기정씨가 갑자기 하시는 말씀:

“젊은 친구, 나하고 한번 뛰어 보겠나?”

이 갑작스런 ‘도전’에 이 젊은 태권도 사범이 할 말을 잃고는 어쩔줄 몰라 하는데 (왠고 하니, 뛰자고 하면 ‘건방진 놈’ 소리를 들을 것 같고, 그렇다고 어른이 얘기 하시는데 안한다고 하기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고 해서), 주위에서 모두들 권한다.

“어르신 모시고 한번 다녀 오지 그래.”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이 달리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코오스는 어디 어디를 거쳐서 출발점으로 되돌아 오는 것. 자신의 체력이 어느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는 그저 노인네 바람 쐬는데 ‘부축’해 드린다는 마음으로 출발했던 이 젊은 사범이 점점 뛸 수록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한 바퀴를 돌고 원점으로 먼저 돌아온 사람은 손기정씨. 뒤늦게 숨이 목에까지 차서 돌아온 젊은이를 보고는 한인회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

“이 친구 고기좀 더 먹여야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