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주말 외출? 탄광 기숙사서 축구하며 돈 아꼈지"

by 독자 posted Sep 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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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흩뿌리던 15일(현지시각)이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40분 떨어진 광산도시 캄프 린트포르트(Kamp Lintfort)의 유일한 한식당인 서울식당에서 60을 넘긴 교민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스트레스 다 풀었어. 붉은악마처럼 한번 응원해보는 게 꿈이었는데, 이번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꿈을 이뤘잖아!”(문흥범·文興範·61) “독일 친구가 전화하더니 자기 집에 태극기 걸어놓고 토고전 응원한대. 우리 처음 왔을 때 ‘야자수 열매 어떻게 따느냐’고 묻던 독일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다니까.”(백상우·白尙祐·65) “그럼. 한국 위상 높아진 거 이번에 실감나더라고. 어제 TV에서 독일이랑 폴란드전 보니까 폴란드 사람들이 응원복이 모자랐대. 그러니까 리포터가 ‘그러면 붉은악마들한테 빌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묻더라고요. 폴란드도 붉은색 아냐. 얘들이 다 아는 거지.”(류한석·柳漢石·68) “이번에 꼭 16강 갔으면 좋겠어요. 아, 그러려면 토고전 때 공 돌리기 하지 않고 점수를 더 냈어야 했는데… 우리 어릴 때는 그렇게 안 했잖아?”(성규환·成圭煥·67)

2006 독일월드컵. 경기장에서는 승자의 흥분과 패자의 쓰라림이 교차하고 거리에서는 축제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 흥분과 축제의 중간지대에 파독(派獨) 광부들이 있다. 40년 전 조국을 떠나 청춘을 막장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외국 노동력이 절실했던 서독과 외화 획득이 절실했던 한국 정부는 차관과 노동력을 서로 제공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3차에 걸쳐 모두 7871명이 독일로 날아가 청춘을 바쳤다.



회갑을 훌쩍 넘어 고희를 바라보는 파독 광부들, 그들은 1973년 ‘글뤽아우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글뤽(Gl?ck·행운) 아우프(Auf·위로)’, 매일 아침 800m 지하 수직갱으로 내려가는 승강기를 타면서 서로에게 던지는 인사말이다. ‘행운이 있기를’이라는 뜻이다. 회원은 1300명 정도. 이 도시 식당에서 만난 성규환씨는 글뤽아우프의 회장. 류한석, 백상우, 문흥범씨는 자문위원이다. “지옥처럼 무서웠던” 40년 전 첫 막장작업의 기억에서부터 “죽어서라도 같이 쉴 수 있는 공동묘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황혼의 희망, 그리고 “반드시 16강에 올라가야 우리들이 사는 맛이 난다”는 월드컵의 흥분까지, 이들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40년 전에 비해 몰라보게 위상이 높아진 조국, 코리아를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했다.

“1963년 12월 23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1차 파독 광부들이 도착했어요. 모두 긴장 반, 흥분 반이었죠. 항공료는 월급에서 할부로 가불했고요. 계약기간은 3년이었죠.” 1차 파독팀이었던 류한석씨가 말문을 열었다. 공무원이었던 류씨는 “외국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다음날 광부로 지원했다. “동생이 공부를 잘했는데, 집안도 어려웠고… 그런데 광고를 보니까 벼락부자가 될 것처럼 돼 있었어요.” 형이 보낸 학비로 공부한 동생 류종민씨는 서울대를 나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지냈다.

백상우씨가 말했다. “그때 다들 가난했어요. 광부 모집한다는데 실제 직업이 광부인 사람은 절반 정도였죠. 자기 한 몸 살려고 한 게 아니라, 다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독일로 온 거예요. 저도 대학생이었는데, 이발소에서 신문 보고 다음날 지원했어요.”

첫 번째 파견된 사람들에게서 회충이 발견됐다. 회충은 습하고 더운 공간에서는 급속도로 퍼져나간다고 생각했던 서독 노동당국은 이들을 격리시키고 영국에서 공수한 회충약을 복용시켰다. 정식 작업은 해를 넘겨 5월에 이뤄졌다.

류씨가 작업 첫날을 회상했다. “작업복을 입고, ‘글뤽아우프’라고 인사를 하고서 승강기를 타니까 어지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1100m를 내려갔어요. 탄(炭) 분쇄기가 뿜어내는 탄가루에 앞은 하나도 안 보이지, 숨은 컥컥 막히지… 지옥이었어요.”

그래도 악착같이 일했다고 했다. 연장근무를 하겠느냐고 물으면 모두가 그러겠다고 했다. 독일 사람들은 주말이면 차를 몰고 여행을 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저 기숙사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돈을 아꼈다고 했다. 월급은 생활비만 남겨놓고 80%를 집으로 보냈다. 그러다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광부들을 찾았을 때 애국가를 부르다 모두 울었다고 했다.

류씨와 백씨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앞에 박 대통령이 서 있었는데, 딱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까지밖에 못 불렀어요. 울먹이다가, 그리고 통곡하다가….”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자면 말문이 턱 막힌다. 가난했기에, 외국을 방문한 한 나라의 대통령이 광산 근로자들의 기숙사에 함께 묵었다. 대통령은 “우리가 잘 산다면 왜 여러분이 부모형제를 저버리고 이역만리인 이곳에서 노동을 하게끔 하겠습니까”라면서 눈물을 닦았다.

성 회장이 말했다. “나라가 못 살고, 개인이 못 살아서 만리타향에 왔지만 그래도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관직 없는 대사’라고 끊임없이 다짐했어요. 선배들은 ‘우리가 잘해야 다른 사람들도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늘 얘기했죠.”

지옥 같은 막장에서 번 돈, 모두 조국으로 송금했다. 한국과 독일 정부가 계약한 이들의 월급은 162달러 50센트. 1인당 국민소득(GNP)이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던 1960년대의 한국은 이들이 보낸 돈을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 보탰다.

백씨가 말했다. “계약기간 3년이 끝나면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어 파독된 간호사들과 결혼하거나 한국에 있던 가족을 불러와 독일에 남았습니다. 독일 정부도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체류를 연장해줬어요.” 파견된 간호사는 총 1만 하고도 37명. 백씨는“광돌이랑 간순이라고 서로 놀려대면서 친하게 지냈어요.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영혼들이 가정을 이룬 거죠.”

막내 격인 문흥범씨가 말했다. “공동묘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우리들은 앞으로 20년 살면 많이 사는 거잖아요. 죽어서라도 같이 쉬었으면 싶어요. 또 흔적을 남겨놓으면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파독 광부들의 유적지를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절실합니다.” 사명감이 컸던 만큼, 잊혀져 간다는 사실이 이들에겐 그만큼 아쉽다.

잠시 말이 없던 이들이 월드컵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밝아진다. 부지불식간에 60을 넘긴 이들이 흥분한다. 토고전이 있었던 지난 13일 프랑크푸르트의 경기장과 광장에 모여 붉은 셔츠를 입고 환호했다고 했다. 등에는 ‘COREA’라고 적혀 있었고 가슴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고 적힌 붉은 셔츠를 입고 한국대표팀의 승리를 빌고 또 빌면서 목청 터져라 응원했다고 했다. 금의환향을 꿈꾸며 떠나 이국(異國)의 깊은 땅속 막장에서 청춘을 바쳤던 젊은이들이 황혼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그들의 조국, 한국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성장했다. 2006 독일월드컵, 그래서 이들은 더더욱 흥분한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