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운하(大運河)를 말할 때인가
대통령을 꿈꾸는 어느 야당 유력 인사가 쉬지 않고 한반도 대운하건설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의 구상에 굳이 시비(是非)를 걸 생각은 없다.
지금 대운하(大運河)를 말할 때인가
대통령을 꿈꾸는 어느 야당 유력 인사가 쉬지 않고 한반도 대운하건설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의 구상에 굳이 시비(是非)를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이 불쑥 내놓았던 경부 고속철도 건설 때문에 나라가 얼마나 혼란에 빠져 있는가. 또 노무현 정권이 벌이는 행정수도 건설 때문에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 얼마나 큰 혼란을 겪어야 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침묵만이 미덕(美德)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1996년이었을 것이다. 내가 경기도지사로 일할 때, 서울의 S대학교 연구소에서 나를 찾아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이른바 대운하계획을 브리핑한 일이 있었다. 당시 그 학교 재단 이사장도 동석하였는데 너무 기발(奇拔)한 발상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연구소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운하 계획을 어디 나에게만 설명하였을까. 정권을 잡은 사람, 또 유력한 대권주자에게 모두 이 계획의 채택을 위해 접근하였을 것은 필지(必知)의 사실이다. 나에게 브리핑한 때로부터만 계산하여도 11년이 지난 지금 그 대운하구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청계천 복원(復元)은 엄격히 말하면 새로운 인공하천(人工河川) 하나를 건설한 토목공사이다. 원래의 자연 청계천 복원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시멘트로 물길을 만들고 한강의 물을 역류(逆流)로 끌어들여 흘려보낸다. 어항(魚缸)에서도 물고기가 사는데 이 인공하천에서 물고가 논다고 청계천의 자연생태계가 살아났다며 흥분하는 언론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청계천 공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비록 인공하천이지만 도시환경 측면에서 얻은 것은 많고 잃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 추진과정에서 교통의 흐름을 유지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해낸 일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일이다.
하지만 대운하건설과 청계천복원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대운하건설은 국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뜩이나 국가경제는 침체되고 국가재정은 눈 덩이처럼 불어나는 채무로 파탄지경이다.
그렇다고 대운하건설이 황금 알을 낳아줄 것인가, 아니면 국가경제나 재정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갈 것인가. 우리는 지금 지혜로운 결론을 내려야 한다. 어리석은 정권이 일을 저지른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대통령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제철소, 자동차공장, 조선소, 석유화학공단을 건설할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에서 볼 때 그 보다 더 무모(無謀)하고 위험한 구상은 없었을 것이다. 잘못되는 날에는 나라가 파산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구상은 적중(的中)하고 오늘 우리 경제는 그 바탕 위에서 굴러가고 있다. 그 구상이 시대의 흐름을 미리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력을 쏟아 붓는 큰 사업은 모름지기 다가올 미래의 변화를 수용하고 있을 때 성공이 담보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두 정권이 추진한 고속철도건설과 행정수도건설은 두고두고 우리 국민에게 부담만 가중시키고 경제적 과실(果實)을 맺어주지 못할 것이다. 냉철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추진한 사업이 아니라 대선의 열기 속에서 정략으로 추진한 사업이니 더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기술력으로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투입될 돈과 시간과 열정이 얼마나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그 돈과 시간과 열정을 투입할 더 긴요한 사업은 없는가, 이것이 더 큰 문제이다.
나는 1996년 이 대운하 구상을 설명하는 분들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하였다.
첫째 우리나라는 내륙국가가 아니라 삼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다. 또 대부분의 산업기지가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다. 주로 원자재를 수입해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산업구조로 볼 때 그 물류를 감당하는 해운 이외에 바지선으로 무거운 화물을 실어 나르는 내륙운하의 효용성이 얼마나 클지 의문이다.
둘째, 우리나라 지형은 동서가 200km, 남북이 500km에 불과하다. 또 산맥으로부터 바다에 이르는 강의 길이는 아주 짧고 경사는 심해 비온 후 급속히 수량(水量)이 줄어 바닥이 드러난다. 자연수로(自然水路)를 그대로 활용할 구간은 거의 없고 모두 인공적으로 수로를 건설해야 하는데, 그 환경파괴와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는 1999년 베를린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 때 독일 경제 전문가에게 라인 강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물동량의 비중이 얼마인가를 질문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라인 강 수로가 감당하는 내륙 물동량의 비중이 65%라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하늘이 준 자연수로를 통해 물류비용을 최소화하며 일으킨 전후 독일경제의 부흥을 사람들은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독일은 내륙 국가이고 대평원의 지형이다. 그래서 라인 강은 언제나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며 굽이굽이 흐른다. 나는 그 라인 강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지선을 바라보며 독일 경제의 맥박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대운하를 말하는 사람들이 독일을 내세우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독일의 지형 여건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관점(觀點)이 있다.
바로 우리의 미래는 지식경제가 산업경제를 빠른 속도로 추월해 간다는 사실이다. 산업경제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경제의 비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대운하는 산업경제의 물류를 감당하는 사회간접자본이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겠지만, 그 보다 더 급히 건설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지식경제의 비전과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야심 찬 전략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서둘러 추진해야 할 사업은 대운하가 아니라 지식경제를 일으키고 지식사회를 선도할 인프라의 구축일 것이다.
이렇게 대운하 구상은 시대의 진운(進運)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진심으로 대운하 구상을 더 이상 정치 상품화하지 말기를 바란다. 비록 그들이 대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 전문가들의 토론과 정상적인 정책결정과정을 거쳐 추진해나가야지 대형 토목공사를 대통령 선거 정치판의 여론으로 결정하자고 나서니 어이가 없다.
대선 판은 합리적 이성보다 뜨거운 감성이 지배한다. 시대착오적인 구상을 내세워 당선이 되면 그 구상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폐해는 고스란히 나라와 국민이 떠안게 된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들판을 바라보며 한숨 진들 무엇을 할 것인가. 해로운 바람은 국민의 힘으로 빨리 잠재우는 것이 좋다.
내년 대선에서는 모름지기 건강한 정권이 세워져 통합된 국민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지식강국과 문화대국을 건설하는데 있다. 수준 높은 지식이 풍부하게 창출되고 더 넓고 더 빠르게 그 지식이 유통되는 기반을 구축하는데 우리의 돈과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2006. 11. 15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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