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여타 독일 거주 한인사회와 마찬가지로 광산근로자와 간호원이 중심이 되어 이룩된 특수한 한인이민사회이다.광산근로자와 간호원 중에서도 특히 간호원이 중심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광산근로자들은 서부 독일 광산지대에 집중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이 현재와 같이 전 독일 대도시에 분포된 것, 특히 북부독일, 베를린 등지에 거주하게 된 것은 이곳에 한국 간호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인 간호원의 거주지에 광산근로자가 유입되어 정착한 것이다.
베를린에 한국인이 처음 거주한 것이 언제인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일합방이후 많은 수의 나라를 잃은 지식인들이 해외로 도피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우거나 유럽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독일 유학생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당시 독일제국대학이던 베를린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수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유학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이후 주로 유학생들이 베를린에 거주하며 생활을 해왔는데, 1960년대말 동백림사건이 터지면서 유학생들이 숫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축이 되었다.
1970년 한국에서 간호원들이 베를린에 소재한 각 병원에 취업나오고, 기계제작회사인 KWU(Kraftwerk Union)에 한국인 기술자들이 파견나오면서 한국인 체류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한인회가 최초로 창립되던 1972년 당시에 베를린에는 간호원의 수만 약 3,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해 유학생들과 KWU(Kraftwerk Union)기술자들이 간호원들과 모여 이국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던 친목회의 성격을 띤 모임으로 사단법인 베를린 한인회를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