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뤽 아우프』
독일의 광부들은 이 말을 들으면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 「행운」을 뜻하는 「글뤽」(Glueck)과 「위 쪽으로」라는 뜻의 「아우프」(Auf)의 두 단어가 지하 수백 수천미터의 막장에서 무사히 일을 마치 고 지상으로 올라와 다시 만나자는 다짐과 기원의 인사말로 묶였기 때문이다.
똑같이 「글뤽 아우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파독광부 친목회(회장 이상호)가 최근 독일 현지에 서 360쪽이나 되는 두툼한 「파독광부 30년사」를 펴냈다. 63년 12월 첫 파독으로부터 따지면 3년 여 지각인 셈.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타향살이 30년의 절절한 심정은 우리가 너무도 일찍 잊어버린 개발연대의 사회상과 당시 아무 대책없이 떠나보냈던 선배 집단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예찬한 시인을 배부른 소리 작작하 라고 욕하기도 했다. 「춘궁기」 「관제 민의」 「한탕주의」 「케세라세라」가 당시 유행어였다. 천신만 고로 대학을 나와도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 우리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렀다. 노동청 게시판에 파독광부 모집공고가 붙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대학을 마치고도 도저히 할 일을 찾을 길 없던 60년대에 마지막 탈출구로 「독일행」을 선택했던 한 인사의 회고다. 이들은 대개 일제 말기에 태어나 광복-분단-6·25-자유당정권-4·19-5·16 등 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불운한 세대였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광부 파견은 77년까지 15년간 계속, 모두 7936명이 독일땅을 밟았다. 절반 정도는 3년 계약기간이 끝난 뒤 귀국하거나 제3국으로 건너갔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현지에 뿌리 를 내렸다.
65년 시작된 간호원 송출도 비슷한 추세. 광부들 보다 다소 많은 1만32명이 76년까지 12년간 「야 릇한 체취」를 풍기는 「낯선 땅」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렸고 그 중 역시 절반 정도가 독일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했다.
統獨 뒤 차별 심화…“기름짠 뒤 깻묵 신세”토로
각종 회고문과 2세를 위한 한국관련 교재들
사실 60~70년대만 해도 이들 광부와 간호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듬직한 큰 형님」이자 「동생들 학비를 꼬박꼬박 부쳐주는 착한 누이」들이었다.
『40도가 넘는 지열(地熱) 때문에 땀이 비오듯했다. 작업 도중 팬티는 다섯번 이상 짜서 입어야 했 고 장화 속의 물은 열번 이상 털어야 했다. 그렇게 벌어서 월 4만원 봉급 중에 3만원 이상씩 송 금했다』
『지하에 처음 들어간 날. 막장의 높이가 1미터나 될까. 몸을 눕히거나 아예 기지 않고는 전진할 수 없었다. 「독일 가면 편히 돈벌 수 있으리라」던 나의 어리석음이 뼈저린 자책이 되어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 준비해 온 빵과 사과를 꺼냈다. 주머니에 쓱쓱 문지르더니 잘도 먹었다. 나도 무의식 중에 사과를 깨물었다. 한 입 베어낸 언저리에 석탄가루가 새카맣게 앉았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대부분 전직했지만 아직도 이런 광산을 평생직장으로 삼고 있는 교민도 수십명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독일에서 환갑을 맞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주위에서 하나 둘씩 생기 면서 「인간 최후의 생존현장」 막장에서 예사롭지 않게 살아온 세월을 정리해야겠다는 욕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30년사」 외에도 이런 회고담류의 글들이 한인사회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나오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런 추세가 느껴진다.
개중엔 이국 땅에서 자연스레 체득한 사회의식도 만만치 않게 눈에 띈다. 「30년사」 중의 한 편지 글은 『독일이 통일된 뒤 외국인에게 가하는 증오가 심각한 상황이네. 옛 동독에 남아도는 노동력 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라더군. 기름 짜먹은 뒤 깻묵은 가차없이 버리는 자본가의 생리가 눈에 선하네』라고 최근 상황을 비판하기도 한다.
독일의 처지에서는 「라인강의 기적」으로 인한 대규모 인력의 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동독인력의 유입이 차단된 상황 등 두가지 요인이 불가피하게 한국인 등 외국노 동자들을 불러들여 잘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내팽개치는 가슴 아픈 상황을 지적한 것.
현재 1, 2세를 합쳐 2만여명의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이들의 최대 현안은 2세교육과 노후대책. 크게 보면 「동화」와 「정체성 보존」의 양대과제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 라서는 「이중 정체성(Double Identity) 확립」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한국인 들만의 2세 교육시설과 양로원, 공동묘지 등을 마련하는 문제로 귀결돼 있다.
물론 쉽지 않다. 재원도 재원이지만 2만여명에 불과한 교민들이 한국 면적의 3.6배에 해당하는 독 일 전역에 흩어져 살다보니 어느 한곳에 특정시설을 만든다는 것도 역시 쉬운 노릇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한인회 친목회 복지회 등으로 나뉘어 있는 한인단체들 간의 이견조정이 만 만치 않다는 점, 나아가 어려웠던 시절 가족과 우리사회 구성원들을 대신해 바다를 건넜던 앞 세 대의 신산(辛酸)을 기억해주는 성의가 현재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점 등도 지적될 수 있다.
독일내 소수민족 순위 38위. 미미한 존재지만 우리에겐 건국 이후 해외 인력진출 제1호. 낯설고 물선 프런티어에서 맨몸으로 현재의 터전을 일군 경험이 귀중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다시 맞을 또 다른 30년은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다.
독일의 광부들은 이 말을 들으면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 「행운」을 뜻하는 「글뤽」(Glueck)과 「위 쪽으로」라는 뜻의 「아우프」(Auf)의 두 단어가 지하 수백 수천미터의 막장에서 무사히 일을 마치 고 지상으로 올라와 다시 만나자는 다짐과 기원의 인사말로 묶였기 때문이다.
똑같이 「글뤽 아우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파독광부 친목회(회장 이상호)가 최근 독일 현지에 서 360쪽이나 되는 두툼한 「파독광부 30년사」를 펴냈다. 63년 12월 첫 파독으로부터 따지면 3년 여 지각인 셈.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타향살이 30년의 절절한 심정은 우리가 너무도 일찍 잊어버린 개발연대의 사회상과 당시 아무 대책없이 떠나보냈던 선배 집단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예찬한 시인을 배부른 소리 작작하 라고 욕하기도 했다. 「춘궁기」 「관제 민의」 「한탕주의」 「케세라세라」가 당시 유행어였다. 천신만 고로 대학을 나와도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 우리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렀다. 노동청 게시판에 파독광부 모집공고가 붙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대학을 마치고도 도저히 할 일을 찾을 길 없던 60년대에 마지막 탈출구로 「독일행」을 선택했던 한 인사의 회고다. 이들은 대개 일제 말기에 태어나 광복-분단-6·25-자유당정권-4·19-5·16 등 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불운한 세대였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광부 파견은 77년까지 15년간 계속, 모두 7936명이 독일땅을 밟았다. 절반 정도는 3년 계약기간이 끝난 뒤 귀국하거나 제3국으로 건너갔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현지에 뿌리 를 내렸다.
65년 시작된 간호원 송출도 비슷한 추세. 광부들 보다 다소 많은 1만32명이 76년까지 12년간 「야 릇한 체취」를 풍기는 「낯선 땅」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렸고 그 중 역시 절반 정도가 독일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했다.
統獨 뒤 차별 심화…“기름짠 뒤 깻묵 신세”토로
각종 회고문과 2세를 위한 한국관련 교재들
사실 60~70년대만 해도 이들 광부와 간호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듬직한 큰 형님」이자 「동생들 학비를 꼬박꼬박 부쳐주는 착한 누이」들이었다.
『40도가 넘는 지열(地熱) 때문에 땀이 비오듯했다. 작업 도중 팬티는 다섯번 이상 짜서 입어야 했 고 장화 속의 물은 열번 이상 털어야 했다. 그렇게 벌어서 월 4만원 봉급 중에 3만원 이상씩 송 금했다』
『지하에 처음 들어간 날. 막장의 높이가 1미터나 될까. 몸을 눕히거나 아예 기지 않고는 전진할 수 없었다. 「독일 가면 편히 돈벌 수 있으리라」던 나의 어리석음이 뼈저린 자책이 되어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 준비해 온 빵과 사과를 꺼냈다. 주머니에 쓱쓱 문지르더니 잘도 먹었다. 나도 무의식 중에 사과를 깨물었다. 한 입 베어낸 언저리에 석탄가루가 새카맣게 앉았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대부분 전직했지만 아직도 이런 광산을 평생직장으로 삼고 있는 교민도 수십명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독일에서 환갑을 맞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주위에서 하나 둘씩 생기 면서 「인간 최후의 생존현장」 막장에서 예사롭지 않게 살아온 세월을 정리해야겠다는 욕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30년사」 외에도 이런 회고담류의 글들이 한인사회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나오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런 추세가 느껴진다.
개중엔 이국 땅에서 자연스레 체득한 사회의식도 만만치 않게 눈에 띈다. 「30년사」 중의 한 편지 글은 『독일이 통일된 뒤 외국인에게 가하는 증오가 심각한 상황이네. 옛 동독에 남아도는 노동력 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라더군. 기름 짜먹은 뒤 깻묵은 가차없이 버리는 자본가의 생리가 눈에 선하네』라고 최근 상황을 비판하기도 한다.
독일의 처지에서는 「라인강의 기적」으로 인한 대규모 인력의 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동독인력의 유입이 차단된 상황 등 두가지 요인이 불가피하게 한국인 등 외국노 동자들을 불러들여 잘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내팽개치는 가슴 아픈 상황을 지적한 것.
현재 1, 2세를 합쳐 2만여명의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이들의 최대 현안은 2세교육과 노후대책. 크게 보면 「동화」와 「정체성 보존」의 양대과제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 라서는 「이중 정체성(Double Identity) 확립」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한국인 들만의 2세 교육시설과 양로원, 공동묘지 등을 마련하는 문제로 귀결돼 있다.
물론 쉽지 않다. 재원도 재원이지만 2만여명에 불과한 교민들이 한국 면적의 3.6배에 해당하는 독 일 전역에 흩어져 살다보니 어느 한곳에 특정시설을 만든다는 것도 역시 쉬운 노릇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한인회 친목회 복지회 등으로 나뉘어 있는 한인단체들 간의 이견조정이 만 만치 않다는 점, 나아가 어려웠던 시절 가족과 우리사회 구성원들을 대신해 바다를 건넜던 앞 세 대의 신산(辛酸)을 기억해주는 성의가 현재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점 등도 지적될 수 있다.
독일내 소수민족 순위 38위. 미미한 존재지만 우리에겐 건국 이후 해외 인력진출 제1호. 낯설고 물선 프런티어에서 맨몸으로 현재의 터전을 일군 경험이 귀중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다시 맞을 또 다른 30년은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다.